조영증, 나이키 축구화의 선구자
2009.07.27 09:49:49


1980년대 초, 국내에 나이키가 상륙하면서 스포츠 용품 특히 스포츠화 부문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고급 스포츠화가 생산되지 않았던 터라 나이키 운동화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TV에서는 연일 “나이키는 누가 신는가! 마라톤의 알베르토 살라자르! 테니스의 존 메켄로!"라는 강하고 멋진 멘트의 광고를 내보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당시 일반 운동화 가격이 2~3.000원, 비싼 게 4~5.000원 정도였는데 나이키 조깅화는 12.000원, 테니스화 및 농구화는 22.000원이었다. 당시로서는 가계(家計)에도 부담이 되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지갑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질 좋고 값비싼'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은 자랑을 넘어 ‘부(富)의 상징’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국산 프로스팩스도 등장하면서 나이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는데 나이키가 한발 앞서 나갔다.

1983년부터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자 나이키 열풍은 더욱 강해졌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나이키 운동화 붐이 일어났고, 급기야 각 학교에 ‘나이키 도둑놈’까지 출몰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난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이키는 분명 최고급 스포츠 메이커였지만 육상-테니스-농구 종목에 한정됐고, 축구 쪽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았다. 당시엔 유럽-남미 선수들 조차 나이키 축구화를 신지 않았으니까.

나이키 축구화가 본격적으로(전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게된 건 90년대 초,중반부터인데 94년 미국 월드컵을 전후에서 많은 선수들이 나이키 축구화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호마리오-베베토 투톱을 비롯한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 대부분이 미국 월드컵 때 나이키 축구화를 신었다.

얼마 전, 올댓부츠 기사를 보니 국내 축구 선수 가운데 나이키와 가장 먼저 계약을 한 인물이 고정운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국내 선수 가운데 최초로 나이키 축구화를 신은 인물은 누구일까? 필자의 기억으로는 조영증(현 파주 트레이닝센터장)이다.

조영증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 동안 한국 최고의 스위퍼로서 각광을 받았는데 81년 미국 프로 리그로 진출해 포틀랜드-시카고를 거치며 3년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 후 84년에 국내 프로 리그로 복귀해 럭키 금성(현 FC서울)에 입단을 했는데 당시 조영증이 국내 최초로 나이키 축구화를 신고 뛰었다.

지난 칼럼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그 무렵 국내 성인 선수들 대부분은 아디다스와 아식스 제품을 많이 신었기 때문에 조영증의 나이키 축구화는 무척 생소하면서도 신선했다. 당시 조영증이 신었던 축구화는 윤기나는 검정색 가죽에 흰색 나이키 마크가 새겨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프로 축구 초창기 때는 인조 잔디가 깔려있는 효창구장에서도 몇 차례 프로 경기가 벌어졌는데 특히 효창구장에서의 야간 경기 때 조영증의 나이키 축구화가 유독 눈에 띄었다.

럭키 금성은 프로 축구 창설 이듬 해인 84년부터 리그에 참가했는데 할렐루야-대우 못지않게 멤버가 화려했다. 박세학 감독이 이끄는 럭키 금성은 GK 김현태를 비롯해 조영증-한문배-정해성-권오손-박항서-이용수-강득수-피아퐁 등 수준급 선수들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조영증은 한문배-정해성-권오손 등과 함께 막강 수비진을 구축했는데 84년 리그에선 자주 센터포워드로 기용돼 28게임/9골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박세학 감독은 팀에 무게감 있는 센터포워드가 없자 체격이 좋은 조영증을 센터포워드로 전격 기용해 큰 효과를 봤다.

조영증은 85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때도 몇 차례 센터포워드로 기용된 적이 있다. 85년 시즌에 럭키 금성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때는 조영증이 월드컵 대표팀에 차출돼 국내 리그엔 5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80년대 초, 대표팀 주장도 역임했던 조영증은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불가리아-이탈리아전에 풀타임 출전했고,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도 멋진 활약을 펼치며 한국이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신장 178cm의 육중한 체격인 조영증은 별명이 ‘히프’였는데 힘이 장사여서 유럽 공격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조영증은 부족한 스피드를 두뇌 플레이로 커버하는 지능적인 스위퍼였다. 70년대 말, 대표팀에서 조영증과 환상의 콤비를 이뤘던 박성화(스토퍼)는 1년 선배인 조영증을 '영리한 수비수'라고 극찬한다. 조영증의 현역 시절 백넘버는 8번이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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