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축구화의 아버지, 김철 장인

창갈이? 새로운 탄생! 축구화 수선이 그저 창갈이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김철 사장의 가게에는 새 축구화도 많다. 길이가 맞지 않거나 발 볼이 맞지 않아 불편한 새 축구화는 김철 사장의 손을 거쳐 맞춤 축구화로 거듭난다. 프로축구 선수 중에서도 새 축구화를 받자마자 장인에게 보내는 단골고객이 많다. “윤정환이도 많이 왔고 (김)대의도 많이 왔지. 선수들은 발이 생명인데 잘 안 맞는 축구화를 신으면 안돼. 나한테 보내서 발에 꼭 맞게 고쳐달라는 거야.” 축구화 수선은 단순히 뜯어진 부분을 꼬매고 다 닳아버린 밑창을 교체해주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축구화를 만드는 것과 같다. “신발의 특성을 다 살려 줘야 해. 수리한다고 다 떼어버리면 안돼. 만들 때부터 특징이 있게 만들어진 거야. 택배로 오는 물건들은 어떻게 고쳐달라는 주문이 적혀있어. 축구화가 비싼데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근데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해주니까. 수선은 창만 갈아주는 게 아니야. 맞춤 구두랑 똑 같은 거야. 발에 잘 맞게 새로 만들어 주는 거지.” “그렇게 오래 걸려요?” 축구화를 수선하러 온 손님이 수선하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는 말에 놀라서 묻는다. 장인이 웃으며 대답한다. “아저씨, 다시 만드는 거예요. 시간이 많이 들어가야 숙성이 돼서 예뻐져요. 수선 시간이 짧으면 발도 아프고 안 좋아요.” 최신 기계를 자랑하는 수선가게들은 1~2 시간에 축구화를 고쳐준다고 광고하고 있지만, 그는 제대로 수선하기 위해서 일주일 정도의 ‘숙성’기간을 갖는다. “수요일, 토요일. 수리된 축구화는 일주일에 두 번 나가지.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보면 돼. 숙성이 돼야 하거든. 접착제도 잘 붙고, 형태도 잘 고정되려면 시간이 필요해. 빨리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야.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어.” 장인의 걱정 그라운드를 누비거나 선수들을 지도하진 않지만 그는 엄연한 축구인이다. 축구선수는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는 축구를 즐기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긴 세월 동안 축구화 수선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축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수선양이 너무 많아도 기분이 좋지 만은 않다. “신는 사람들이 가벼울 걸 찾으니까 만드는 회사측에서도 가볍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거야. 가볍게 만들면 망가지기가 쉽거든. 그리고 요즘 안 좋은 소재를 쓰는 회사도 많아. 생산 공장은 죄다 중국에 있고. 그러면 좋은 축구화가 나오지 않아. 가격은 비싼데 말이지.” 그는 계속해서 입지를 잃어가는 국내 축구화의 현실에도 씁쓸해했다. “키카가 (양이) 많이 줄었어. 물론 쉽지 않은 것도 알아. 나 축구화 만들어 봤지만 쉬운 게 아니거든. 개발하는 데 돈이 엄청 많이 들거야.”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인터뷰 동안 장인은 축구화 수선에 대한 열정과 축구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그가 장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가니 옆으로 곧 철거될 동대문 운동장이 어렴풋이 보인다. 가게 옆에 버티고 섰던 동대문 운동장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장인에게 은퇴는 아주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05월31일

정경호가 말하는 '키카 K777'

저의 첫 축구화는 시장표였어요. 5천원 정도 했었는데 항상 신고 다녔죠. 학교갈 때도 신고, 교실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는 운동장에 나올 때 다시 축구화를 신었어요. 그러던 즈음, 당시로서는 꿈의 축구화인 키카의 K777을 신게 됐어요.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저희 부모님은 아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흔쾌히 허락하셨거든요. 그게 상당히 비쌌어요. 당시 유일하게 ‘검은 뽕(스터드)’이 있었고요. 다른건 전부 흰 스터드였거든요. 그래서 상당히 아껴 신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시합에만 신고 나갔고, 시합 때도 비오면 안 신었어요. 이제는 구두약을 발라서 관리하는 축구화가 없지만, 그 때는 구두약으로 까맣게 잘 칠해서 사물함 위에 딱 올려놨어요. 보물 모시듯 아꼈죠. 제가 (설)기현이 형하고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는데요. 형은 집 형편이 안좋아서 감독님이 축구화도 사주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때는 형이 워낙 말랐어요. 키는 지금처럼 컸는데 너무 말라서 휘청휘청 거렸어요. 상상이 안되죠? 그래도 형은 정말 열심히 했고, 그 결과 지금처럼 성공하게 된거죠. 지금 신고 있는 축구화는 나이키의 머큐리얼 베이퍼2 모델이에요. 지금은 단종됐는데 예전에 구해놨던 것을 꺼내 신고 있어요. 그나마 하나 밖에 남지 않았죠. 제가 칼 발에다가 스피드를 이용하는 편이기 때문에 날렵한 축구화를 좋아해요. 머큐리얼 베이퍼 시리즈 중에서도 그 모델이 가장 좋아요. 축구인들 사이에서는 소위 ‘명품 축구화’로 통한다니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 주지도 않고 잘 챙겨놨죠. 축구화를 받아오면 부모님이 저도 모르게 막 줘버리는데 이것만은 절대 사수했어요. 이제 남은 한 족은 시합 때만 신을 예정이에요. 축구화는 뽕이 생명이거든요. 올 시즌 어떻게 버텨낼지 걱정이에요.

05월29일

나이키의 심장, 포틀랜드를 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창의력, 도전, 혁신’과 같은 단어들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기에는 충분한 개념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눈에 잡히지 않는 가치들을 눈에 보이는 제품으로 만들어 내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나이키의 디자인 철학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난 필 디킨슨은 ‘엉뚱함’과 ‘과학적 접근’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개의 단어를 함께 사용했다. 그는 나이키 풋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엉뚱한 상상이 새로운 제품의 개발마다 어떤 착안점이 됩니다. 우리는 좀 더 빠르고 날쌘 축구화의 뒷축을 고안하기 위해 람보르기니의 후면을 관찰해요. 비행기에 사용되는 소재로 운동화를 만들 수도 있고요. 세상의 모든 팀이 이기길 원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팀이 이기길 원하잖아요. 그럼 무엇을 못하겠어요? 당장, 선수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야죠.” 그는 2008년 나이키에서 새롭게 출시되는 세계 각국 유니폼들의 컨셉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한국대표팀 유니폼의 디자인이 유난히 타이트하다”는 기자의 질문에 활짝 웃는다. “그렇죠. 훨씬 다이나믹하지 않나요? 나이키는 제품을 그냥 만들지 않습니다. 모든 개발 단계에서 선수들의 피드백을 받죠. 제 생각에는 이 중에서 한국대표팀의 유니폼이 가장 인상적인 것 같은데요.(웃음)” 나이키가 자신들의 제품에 자신감을 갖고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은 바로 그 디자인 철학이 과학적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영감’을 실제 데이터로 만들어 내는 곳이 바로 나이키 캠퍼스에서 제품개발을 위한 핵심연구가 이뤄지는 곳 ‘NSRL(Nike Sports Research Lab)’이다. 직접 연구실 소개를 맡은 NSRL의 이레즈 모렉 연구원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개발을 위한 정보의 수집, 더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실제적용”이라고 강조했다. 한 예로 토탈 90을 개발할 당시 나이키 연구원들은 발등에는 70개의 서로 다른 슈팅 포인트가 있고, 공이 맞는 위치에 따라 골의 정확도에 실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웨인 루니와 함께 수십 번의 테스트를 거친 후 좀 더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고, 이런 결과들이 그대로 디자인에도 반영됐다. 그들은 지난 6년 간 프리미어리그의 득점왕이 모두 나이키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강조한다. 가족 같은 회사, 혁신의 원동력 나이키의 캠퍼스 투어 공개행사가 마무리 되어갈 때 즈음 기자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최고가 되기 위한 스트레스는 어디에도 없는 걸까? 2008년 새롭게 출시되는 나이키의 새로운 축구공 ‘OMNI’를 비롯 새로운 축구장비를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던 크리스 본드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이키의 축구용품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글로벌 매니저다. “스트레스요? 글쎄요, 이 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흥분되고, 매력적이에요. 나이키 캠퍼스 자체가 하나의 ‘가족’ 같은 느낌이거든요.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행운이죠.” 2만 명 이상의 직원들이 나이키 캠퍼스에 상주하고 있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치열한 경쟁, 바쁜 일상,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야 하는 압박감 등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나이키 캠퍼스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여유’다. 직원들 대부분에게서도 이곳이 평화로운 하나의 ‘나이키 마을’과 같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실제로 나이키 캠퍼스 안에는 각 건물마다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급 카페테리아 시설부터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까지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다. 캠퍼스 한 켠에는 나이키의 일본인 투자자를 기념해 만들었다는 일본식 정원까지 있을 정도니 어느 곳으로 발길을 돌려도, 그야말로 동화 같은 풍경이 계속된다. 세계 최고의 환경이 그들의 창의력을 촉진하고 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 내도록 돕는다. 사실 나이키가 축구시장은 물론 스포츠 마케팅 영역에서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거듭난 방식은 ‘아메리칸 드림’과 많이 닮아있다. 그것은 빠르고, 또 대중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자본을 바탕으로 하나의 ‘히스토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이키가 만드는 옷, 신발, 가방 그 모든 것이 ‘살아있는 역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개척자들은 그렇게 역사를 만들어 간다.

05월26일

이동국이 나이키 리게라를 신는 이유

제가 축구를 처음 시작한 계기는 아디다스 축구화와의 만남 때문이었어요. 축구를 시작할 때 아디다스 축구화를 주는거예요. 그래서 속으로 \'아디다스 축구화를 매일 신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디다스는 그 때 뿐이었고 그 뒤로는 키카에서 나온 축구만 신었죠. 아디다스 축구화는 처음 시작할 때 두 켤레 준 것으로 끝이었어요. 그 뒤로는 계속 본인 돈으로 사 신었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진 키카만 신었죠. 그러다 프로 입단하면서 아디다스 축구화를 다시 만났어요. 고3때 포항하고 계약을 했는데 잔디에서 신을 축구화가 없었어요. 맨날 맨 땅에서만 축구를 했으니까요. 그러다 계약하기 전 감독님께서 아디다스의 코파 문디알을 갖다 주셨어요. 너무 좋은거예요. 얼마나 좋아. 아까워서 신지도 못하고 모셔뒀어요. 시중에는 비싸서 잘 팔지도 않는 축구화였으니까요. 그래서 고이 모셔두고 경기할 때만 신었는데 그거만 신으면 골이 잘 들어가는거에요. 근데 프로에 오니까 그 축구화가 굉장히 많았어요. 난 애지중지하면서 경기 때만 신었는데 좀 어안이 벙벙했죠. 그 뒤로 프로에서는 줄곧 나이키의 축구화만 신고 있어요. 1998년에 처음 신었는데 그 당시에는 축구화로서는 아디다스부터 뒤져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이키라는 브랜드 자체에 굉장히 매력을 느꼈어요. 멋있잖아요. 나이키의 여러 모델을 지금까지 신고 있는데 그 중에서 전 티엠포 축구화를 좋아했어요. 예전에 나온 모델인데 지금 것은 조금 무겁더라고요. 그리고 머큐리얼 베이퍼도 많이 신었는데 최근에는 리게라도 신고 두루 번갈아가며 신고 있어요. 그러는 이유는 발이 편하기 위해서죠. 지금 발 뒤꿈치가 불편한데, 리게라가 힘이 좀 없어서 신으면 편안해요. 물론 연습때는 베이퍼를 신지만 경기할 땐 정말 편한 축구를 신으려고 해요. 처음 프로에 왔을 땐 티엠포를 신었고 축구화는 정말 편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근데 아쉬운 점이 있어요. 시간이 흐를 수록 축구화가 계속 바뀌니까 예전에 내게 맞던 축구화가 없어져요. 그럼 새로운 축구화에 발을 맞춰야해요. 그런게 불편해요. 전용 축구화를 제작하면 편할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예전에 제 발에 맞춘 전용 축구화를 신었는데 그게 더 불편해요. 오히려 시중에 나오는 것을 신는게 편하더라고요. 내 발에 맞춰 나오는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요. 축구화에 그냥 발을 맞추는게 더 나아요. 그래서 전 멋보다는 편한 것을 축구화를 선택할 때의 기준으로 삼아요. 새 디자인, 새 모델이 계속 나오지만 예전 모델이 편하면 그걸 신는 편이에요. 그래서 신어보다 괜찮다 싶으면 여러 개 준비해서 집에 놔두죠. 나중에 그 모델이 없어질 경우를 대비해서요. 김성진 기자

05월21일

원조 축구화 매니아, 최강희 감독

\"우리 어렸을 때는 초등학생이 축구화를 신고 시합을 못했어. 없었지.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운동화를 신고 시합을 했어. 그러다가 6학년 때 아버님이 축구화를 사주셨는데 시합을 못했어. 다른 아이들이 축구화 신어서 무섭다고 도망을 갔거든. 뭐 그런 시절이 있었어. 그러다 중학교 때는 내가 운동을 안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다시 시작을 했는데 그 때는 가죽창에 뽕(스터드)을 박은 축구화를 신었지. 당시에는 키카도 없었고 동대문 운동장에 있는 서경축구화나 정신축구화를 거의 다 신었지. 수제화였어. 괜찮았냐고? 괜찮지 않지. 맨땅에서 축구를 하면 뽕에 박은 못이 발 쪽으로 올라오는 거야 그러면 다시 징걸이로 못을 박고 뛰었어. 예전 선수들은 다 그런 기억이 있을 거야.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마추어 팀에서 뛸 때는 메이커 신발을 사든지 선배들한테 얻든지 그랬어. 그 때는 뭐든지 정말 귀했지. 선배한테 신발을 얻거나 원정 가서 구입하면 칫솔로 하얀 데를 닦고 애지중지 여겼어. 요즘은 널린 게 축구화라서 요즘 선수들은 장비에 대한 소중함은 좀 없는 것 같아. 내가 주로 신던 브랜드는 아식스하고 아디다스였는데, 아디다스는 발이 좀 베기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아식스를 많이 신었어. 당시에도 대표 선수들이 프로 스펙스와 계약하면 200만원을 현금으로 주고 축구화도 많이 갖다 주긴 했었지. 그래도 많은 선수들이 스폰서도 없었고, 당시에는 에이전트도 없어서 구단에서 나오는 거 신었어. 아마 한 두 선수 정도 스폰서를 받았지. 좀 유난스러운 면이 있어서 남들은 한 시즌에 2~3켤레 신었는데, 난 12켤레 이상 축구화를 소비했어. 험하게 신었다고 해야 하나? 3~4번만 신어도 연습용으로 돌렸어. 축구화에 탄력이 떨어지는 것을 싫어했거든. 일본 원정이라도 가면 축구용품 사는데 찾아 다녔지. 근데 길을 모르니까 갈 때는 택시를 타고 가는 거야. 한 2만엔 정도 나올 때도 있었는데 돌아올 때는 지하철 타고 700엔에 돌아왔었어. 하하. 잘 알아보고 갈걸. 그러고 보면 지금 축구화는 좋아진 정도가 아니지. 스텔라와 에쿠스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베기지도 않지, 물집도 안 잡히지, 길을 들일 필요도 없지. 예전에는 가죽이라서 260mm을 사서 265mm를 만들었다니까. 처음에는 발가락을 오므리고 신어서 늘렸던 거지. 그런데 이제는 가벼운 것도 있고, 묵직한 것도 있지. 뽕 모양도 여러 가지고. 정말 너무 좋아진 거야.\" 류청 기자

05월21일

염기훈, "행운의 남색 아디다스 축구화"

\"저는 다른 선수들보다 늦게 축구를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 수영을 했거든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축구를 시작했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그래도 축구를 하고 싶었고, 한 달이었나? 부모님께 계속 축구를 하게 해달라고 졸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더라. 아버지가 축구화를 하나 사오셨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축구를 하게 됐죠. 그때 아버지께서 사오셨던 축구화가 키카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제 첫 번째 축구화였죠. (웃음) 그 뒤로 많은 축구화를 신었어요. 그 중에서도 작년에 아시안컵에 나가기 전 아디다스에서 제작한 축구화를 가장 아끼고 있어요. 그 축구화에는 제 이름과 태극기가 새겨져 있었는데 한 번도 신지도 않고 잘 모셔두고 있죠. 사실 아시안컵에 나갔을 때 그 축구화를 신고 경기에 뛰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시합하기 며칠 전에 축구화를 받아서 안 신기로 했죠. 경기를 앞두고 갑자기 새 축구화로 갈아 신으면 발이 적응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아시안컵에서는 그전에 신었던 발에 익숙한 축구화를 신고 나갔어요. 그러고 보니 새 축구화와는 안 좋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네요. 이라크와의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제가 승부차기를 실축했어요. 결과는 뭐 다들 아실거고요.(웃음) 그 때 비가 와서 새 축구화를 신고 나갔어요. 계속 신던 축구화는 가죽이 흐믈흐믈해서 비를 맞으면 늘어나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새 축구화를 신었죠. 그렇지만 발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승부차기를 할 때 잘못 된 것 같아요. 그래도 아디다스에서 나온 남색 축구화가 있는데 그 축구화만 신으면 골이 잘 들어갔어요. 그래서 에이전트한테 그 축구화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죠. 저는 제 발이 평발에 가까워서 신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축구화를 많이 찾았죠. 편안하고 축구화 가죽을 만졌을 때는 부드러운 느낌이 나는 걸로요. 그리고 축구화의 무게도 주의 깊게 선택해요. 요즘 나오는 축구화들은 가벼운 제품들이 많은데 저는 너무 가볍거나 반대로 무게가 많이 나가는 축구화는 싫어해요. 어느 정도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축구화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축구화를 선택할 때 질감을 우선적으로 봐요. 발등을 엄지로 문질러 확인한 뒤 부드럽게 느껴지는 제품을 선호하죠. 팬들께서도 축구화를 고르실 때 저처럼 한 번 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제가 지금 신고 있는 축구화도 부드럽고 발이 굉장히 편해요. 이전에 신은 축구화는 딱딱한 느낌인 많았는데 이번에 새로 신고 있는 것은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죠.\" 김성진 기자

05월21일

데드볼 스페셜리스트 이천수의 축구화

\"축구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약 6년 동안 키카를 신었어요. 처음에는 노란 ‘뽕’이 들어간 3만 원짜리 축구화를 신었어요. 그 때는 축구화의 기능, 편리성 같은 건 모를 때였죠. 축구화와 기량을 연결시키지도 못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축구화가 달라지면 경기도 달라진다는 걸 느꼈어요. 그 때는 나이키를 신었어요. 대학 때는 제가 나이키와 처음으로 스폰서 계약을 맺으면서, 그리고 고려대가 나이키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나이키 축구화를 계속 신었어요. 저는 좀 무겁거나 투박한 느낌의 축구화는 못 신어요. 제가 스피드를 요하는 축구를 하기도 하고, 또 대표팀에서는 전문 킥커로서 프리킥을 차잖아요. 그래서 스피드를 향상 시키고 예리함을 가질 수 있는 축구화를 좋아해요. 맨발로 차는 느낌이 나는 축구화라고 해야 하나? 맨발로 공을 다루고 프리킥을 차면 잘 맞거든요. 그래서 얇고, 가벼운 느낌의 축구화, 발바닥이 밀착되는 축구화를 좋아해요. 나이키 제품으로 말하자면 베이퍼(VAPOR). 그 제품만 8년을 신었어요. 물론 다치면 크게 다칠 수 있죠. 제가 제일 아끼는 축구화는 고등학교 2~3학년 때 신었던 나이키 축구화예요. 오래 신을수록 빛나는 축구화예요. 축구화 밑창의 나이키 로고가 닳으면서 색깔이 변해요. 저희 고등학교가 고려대랑 연습 게임을 많이 했는데, 당시 그 축구화 신고 골키퍼도 막지 못하는 슈팅을 많이 때렸는데, 덕분에 제가 고려대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나이키에서 토탈90 레이저가 나오면서 많이 불편하더라고요. 밑창이 강화되면서 약간 딱딱하고 유연성이 없는 축구화가 됐어요. 계약이 돼 있어서 불편해도 신어야 하는 상황이 돼서, 이전 제품을 미국에까지 수소문해서 찾아 신었죠. 용품을 바꾸었던 이유 중 하나도 축구화가 맞지 않아서였어요. 새로 나온 푸마 제품을 신고 네덜란드 첫 선발 출장할 때 신고 나갔어요. 저는 축구화 감각에 굉장히 민감한 사람인데 새 축구화를 신자마자 나간 거예요. 프로 생활하면서 쇠창 축구화를 신고 첫 시합을 나간 건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프리킥이나 슈팅을 때려도 이상이 없더라고요. 약간 크기 조절만 된다면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실 선수 입장에서 8년 동안 신었던 축구화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은데 괜찮더라고요. 축구를 즐기는 분들은 축구화를 고를 때, 유명 선수들이 신는 축구화를 유심히 보는 것도 좋아요. 축구화에 민감한 사람들이고, 많은 고민 끝에 고르거든요.\" 이민선 기자

05월21일

설기현의 3천 원짜리 축구화

\"축구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랑 같이 신발 가게에 가서 축구화를 샀어요. 축구화만 파는 곳도 아니었고, 축구화 전문 회사가 만든 축구화도 아니었어요. 이름없는 3천 원짜리 축구화였죠. 그런데 첫 훈련 때 신발끈을 묶는데, 축구화의 혀 부분이 확 뽑히는 거예요. 당시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죠. 그래도 기분은 무지 좋았어요. 처음으로 축구화를 신었으니까요. 그 이후 어렸을 때 축구를 하면서는 키카 축구화를 줄곧 신었어요. 아디다스보다는 비싸지 않고. 또, 팀에서 1년에 한 번씩 나오는 축구화가 바로 키카 축구화였거든요. 저는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나이키와 계약이 돼 있어서 꽤 오랫동안 나이키를 신어서 그런지 지금은 다른 축구화를 신지 못하겠어요. 벨기에 안더레흐트에 있을 때는 팀 전체가 아디다스와 계약이 돼 있어서 신발까지 아디다스를 신어야 했는데 적응하는 데 1년이 걸렸어요. 너무 무거워서 못 신겠더라고요. 지금이야 개인 스폰서를 받으니까 상관 없지만 그 때는 좀 힘들었어요. 현재 신고 있는 축구화는 나이키 베이퍼(VAPOR)예요. 제 발이 칼발인데, 그러다 보니 베이퍼가 발에 잘 맞아요. 영표 형이 신는 축구화도 나이키인데 무게가 좀 있어요. 제가 신으면 길이는 맞는데 폭이 안 맞아요. 제가 가장 아끼는 축구화는 2002년 월드컵 때 나이키에서 받은 축구화예요. 당시 나이키가 각 나라마다 대표 선수를 선정해서 축구화를 제공했는데, 저하고 영표 형이 그걸 받았어요. 그 때 받은 게 베이퍼 한정판이었어요. 그 축구화를 신고 이탈리아 전에서 동점골을 넣었어요. 지금 제가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는 축구화예요.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축구화를 고를 때는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자기 발에 편한 걸 고르세요. 축구 경기를 하면서 모든 정신을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축구화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러우면 안돼요. 그냥 자기 발에 편한 걸 고르면 됩니다.\" 이민선 기자

05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