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홍명보가 사랑한 축구화

제가 현역시절에 가장 선호했던 브랜드는 디아도라였습니다. 포항에 있을 때는 거의 디아도라 축구화만 신고 뛰었어요. 일단 가죽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발에 딱 맞을 뿐 아니라 편안한 느낌으로 신을 수 있는 축구화였습니다. 한때 N사에서 광범위하게 선수들과 스폰서 계약을 맺으려고 했는데, 그때도 저는 축구화만큼은 디아도라를 고집했을 정도죠. 관련된 에피소드라면 브라질로 전지훈련 갔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전지훈련을 갈 때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굉장히 많은 축구화를 챙깁니다. 저도 브라질로 떠나기 전 이탈리아에서 갖고 온 디아도라 새 축구화를 몇 켤레 챙겨서 떠났죠. 그런데 하필이면 전훈 기간 내내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예요. 비가 내리는 데 연습경기를 하는 일정이 계속됐어요. 신기한 건, 비올 때 신었던 신발을 말려서 다시 신으면 완전히 새 축구화 같았다는 겁니다. 그때 착용감이 너무 좋아서 그 축구화를 일년 넘도록 신었던 적이 있어요. 그 즈음 디아도라가 한국에 브랜드를 런칭하고 매장들도 막 생겼던 것 같아요. 로베르토 바지오가 방한 경기를 갖고 들르기도 했죠. 뒤져보면 어딘가에 바지오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을 겁니다.(웃음) 저는 투박한 느낌의 축구화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제가 신었던 축구화는 당시로는 꽤 샤프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처럼 너무 가벼운 정도는 아니었고요. 축구화가 경량화 추세를 보이면서 부상이 잦아진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축구화 소재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는 가죽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발이 밀리는 일은 없었는데, 요즘은 가죽이 아니어서 발이 밀리고 뼈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재에 따라서도 발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죠.

07월16일

'황금 왼발' 나나미의 축구화 선택법

90년대 중, 후반 아시아 최정상급 미드필더로서 맹활약했던 일본의 나나미 히로시. 현역 시절 그의 왼발에서 뿜어나오는 날카로운 패스는 천하일품이었다. 그의 ‘킬러 패스’는 라이벌인 대한민국 대표팀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일본 축구 전문가들은 나나미 히로시와 나카다 히데토시, 둘을 놓고 이렇게 평한다. \"종합적인 면에선 나카다가 앞서지만 \'나나미의 왼발\'과 \'나카다의 오른발\'을 비교했을 때는 나나미의 왼발이 한수 위!“라고 입을 모은다. 탁월한 경기 조율 능력과 섬세한 패싱력을 자랑했던 나나미이기에 축구화를 고를 때도 신중을 기하고 또한 최고급 모델을 신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뜻밖에도 나나미는 축구화에 그다지 민감한 편이 아니었다. 현역 시절 나나미는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는데 계약 관계에 있는 아디다스 측에서 “이번에 이 모델을 신어줄 수 있겠냐?”고 하면 무조건 “알았다!”고 답했다. 축구팬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어떤 메이커든지 같은 모델이라도 일반 매장에서 판매 되는 제품과 스타급 선수들이 신는 제품은 차이가 있다. 선수들이 신는 제품은 선수 개인의 발 형태와 특징을 살려서 제작을 하는데 나나미는일반 매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을 신었다. 그렇다고 나나미가 무조건 아무 축구화나 다 신은 건 아니다. 나나미도 기피하는 축구화가 있었다. 바로 캥거루 가죽 소재의 축구화다. 첫 번째 칼럼(‘초고급 축구화의 제1 원소, 천연 가죽’)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각 메이커 최고급 모델은 대부분 캥거루 가죽 소재이고, 선수들 거의 최고급 모델을 신는다. 하지만 나나미는 소가죽 소재의 축구화를 선호했다. 캥거루 가죽 축구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가죽이 매우 얇고 부드럽다는 것인데 오래 신거나 혹은 물에 젖었을 경우 늘어나는 단점이 있다. 나나미가 처음 축구화를 신은 건 5살 때였다. 당시 꼬마였던 나나미에게 맞는 사이즈의 축구화가 없었기 때문에 3센티미터 정도 큰 축구화를 구입한 후, 발 앞 쪽에 솜을 잔뜩 끼워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캥거루 가죽 축구화를 신기 시작 했는데 수중전을 한번 치르고 나면 축구화가 많이 늘어나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어릴 적, 불편했던 그 느낌이 성인이 된 후에도 이어져 나나미는 현역 생활동안 캥거루 가죽 소재의 축구화를 거의 신지 않았다. 나나미는 축구화를 고를 때 크게 두 가지에 중점을 뒀다. 하나는, 축구화 앞 부분에 (실)박음질이 여러 줄로 된 걸 선호했다. 박음질이 여러 줄로 돼있는 축구화가 덜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축구화 뒤꿈치 부분이 깊은 제품을 좋아했다. 나나미가 아디다스와 계약할 당시 타사 축구화와 비교를 해봤다고 하는데 아디다스 축구화가 타사 제품에 비해 뒤꿈치 부분이 조금 더 깊었다고 한다. 나나미는 축구화 뒤꿈치 부분이 깊어야 킥을 하는데 안정감이 있다고 말한다. 나나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축구화는 “볼과 느낌이 통하는 것”이란다. 2000년 아시안컵 MVP 수상자이기도한 나나미는 08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현재는 축구 해설자 겸 평론가로서 활동 중이다. 사진= ⓒ주빌로 이와타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7월13일

평발의 박지성이 처음으로 선택한 축구화는?

제 첫 축구화는 프로 월드컵으로 기억해요. 사실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에는 모든 용품을 학교에서 받았어요. 축구화까지 전부 다요. 그냥 시장에서 살 수 있었던 이름없는 축구화였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처음으로 산 축구화가 프로 월드컵 축구화였어요. 가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머니와 함께 매장에서 샀어요. 당시 새 축구화를 사고 난 후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시장에서 그냥 파는 축구화가 아니라 메이커였기 때문에 당연히 좋았던 것 같아요. 새로운 용품이 손에 들어온다고 해서 왠지 축구가 더 잘 될 것 같은 느낌은 없었어요. 단지 새로운 축구화라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죠. 지금 현재는 모든 것을 구단에서 관리를 해주지만, 학생 시절에는 구두약을 칠해가며 관리를 했던 기억이 나요. 맨 땅에서 축구를 하기 때문에 축구화의 수명이 그리 길지도 않았어요. 밑창이 빨리 닳고는 했는데, 지금은 스터드를 교체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에는 일체형이었기 때문에 밑창 전체를 교체해야 했습니다. 이 방법이 새로운 축구화를 사는 것 보다 더 저렴했어요.(웃음) 밑창을 한 번 교체하는 것은 기본이고, 두 번 교체하면 ‘많이’ 갈았다고 하고, 세 번 교체하면 ‘징하게’ 갈았다고 농담을 하곤 했어요. 제가 평발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 특별히 다른 축구화를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많은 종류의 축구화가 없었거든요. 현재의 티엠포 스타일, 캥거루 가죽으로 된 축구화가 대부분이었어요. (물론) 어린 시절에 대표팀 경기를 많이 지켜 보면 선수들이 메이커 축구화를 신고 나오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축구화를 그리 많이 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07월09일

조용형이 SG 축구화를 꺼리는 이유는?

축구화를 고를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바로 안정감이에요. 그동안 나이키 스폰서를 받으면서 Total 90 시리즈를 줄곧 애용했죠. 최근에는 티엠포 레전드 시리즈를 신고 있어요. 특히 티엠포 레전드 3는 기존의 티엠포 시리즈와 달리 발을 잘 잡아준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일단 제 포지션이 격렬한 움직임과 많은 방향 전환을 소화해야하는 수비수이기 때문에 티엠포 레전드 3처럼 착화감이 좋은 축구화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게 사실이에요. 축구화 선택에 있어 한 가지 특이한 취향이 있다면 저는 일명 \'쇠뽕\'이라고 불리는 SG 축구화를 절대 신지 않아요. 많은 수비수들이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하기 위해 잔디와의 마찰력이 높은 SG 축구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볼 때 한국 잔디는 거칠고 이미 바닥의 마찰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스터드가 지면에 깊이 박힐 필요가 없다고 봐요. 그래서 저는 스터드 높이가 비교적 낮고 재질이 가벼운 FG 축구화를 즐겨 신어요. 부상 위험도 상대적으로 적은 점도 무시할 수 없죠. 그렇다고 해서 한 가지 모델만 신는 것은 아니에요. 날씨도 축구화 선택에 영향을 미치죠. 맑은 날씨에는 티엠포 레전드 3처럼 원통형 스터드 축구화를 즐겨 신어요. 그러나 한국의 짧고 거친 잔디도 비가 오면 물기 때문에 마찰력이 감소해 더 미끄럽고, 비가 오고 난 직후에는 천연잔디의 마찰력이 인조잔디보다 크기 때문에 수중전에는 마치 굵은 스터들 신은 것처럼 회전력을 높일 수 있는 막대형 스터드 축구화도 준비해 놓죠. 실제 프로 선수라면 경기하는 동안의 날씨와 그라운드 환경을 고려해 여러 축구화를 골라 신곤 해요.

07월02일

옛 선수들의 벗 아식스

나이키-프로스팩스 등이 등장(1981년 경)하기 전까지 국내에는 질 좋은 가죽 스포츠화가 생산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전문 스포츠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인 운동 선수들의 경우엔 어쩔 수없이 아디다스, 아식스, 미즈노 등의 값비싼 외국 제품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축구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국내 성인 선수들은 아디다스와 아식스 축구화를 많이 신었다. (참고: 미즈노는 1980년대 초까지 모렐리아 라인을 생산하지 않았다.) 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은 아디다스와 아식스에서 유니폼을 비롯한 용품을 후원 받은 듯한데 특히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는 대표팀 유니폼, 스타킹, 축구화 모두 아식스 제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프로 축구팀인 할렐루야는 창단 때부터 유니폼을 비롯한 모든 용품이 아식스 제품이었다.(할렐루야도 아식스사로부터 후원을 받은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당시 할렐루야 제 1 유니폼이 상의가 노란색, 하의가 남색, 스타킹이 노란 색이었는데 선수들 축구화도 검정색 가죽에 노란색 라인이 그어진 제품이었던 터라 마치 유니폼과 축구화가 한 세트처럼 보였다. 흰색 라인이 그어진 축구화를 신은 선수도 몇 명 있었지만 노란색 라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에서 활약하는 김주성이 아디다스 축구화, 일본 J리그 산프라체 히로시마에서 뛰는 노정윤이 푸마 축구화를 신었고, 그 외 선수들은 아식스 축구화를 신었다. 이렇듯 우리 선수들은 과거부터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는데 그 중에서 유독 아식스 축구화를 애용한 이가 현 전북 현대 감독인 최강희다. 최강희는 이에 대해 얼마 전, [올댓부츠]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 우신고 출신인 최강희는 83년 포철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이듬 해인 84년 현대로 이적해 92년까지 부동의 오른 쪽 사이드백으로 활약하며 프로 통산 207경기에 출장했다. 28세 때인 88년에 늦각이로 대표팀에 발탁된 최강희는 서울 올림픽과 같은 해 12월 카타르에서 열린 제 9회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 참가했고, 2년 후인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경기 모두 주전으로 풀타임 활약했다. 90년 월드컵 당시, 신예 황선홍과 수비수 박경훈이 프로스팩스 축구화를 신었고, 그 외 선수들 대부분이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는데 최강희는 3경기 모두 아식스 축구화를 신고 뛰었다. 최강희는 축구화 끈을 매고난 뒤, 그 위에 흰색 테이프(반창고)를 발등에서 발바닥 쪽으로 몇 차례 칭칭 감는 특징도 갖고 있었다. 대기만성의 표본인 최강희는 체구는 작았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구력을 자랑한 수비수였는데 그는 현역 시절을 아식스 축구화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뇌리에는 지금도 \'최강희=아식스 축구화, 아식스 축구화=최강희\'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같은 시기, 최강희 외에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던 선수가 최인영 골키퍼였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현재 전북 현대 감독과 코치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조만간, 이 코너에서 아식스사의 역사 및 아식스 축구화를 즐겨 신었던 세계적 선수들에 대해서도 다뤄볼까 한다. 덧.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남-북 대결에서의 차범근 모습을 보면 축구화 뿐 아니라 유니폼, 스타킹 모두 아식스 제품인 걸 알 수 있다. 언뜻 보면 세 줄이 그어진 아디다스 유니폼 갖지만 두 줄이 그어진 아식스 유니폼이다. 당시 아식스는 한 줄은 굵고, 한 줄은 가느다란 디자인이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06월30일

어린 황선홍의 소중한 축구화

축구화를 처음 신었을 때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해요. 아버지가 사 주신 첫 축구화는 ‘자가’라는 시장표 축구화였어요. 우리끼리는 ‘짜가’라고도 불렀던 축구화죠. 그 당시에는 남자 아이들 사이에 축구화를 신고 등, 하교 하는 게 유행 같은 거였어요. 길 위에서 ‘따각따각’ 소리를 내면서 걸으면 괜히 우쭐해지는 느낌 있죠? 일종의 특권의식 같은 거였어요. 그땐 축구화를 정말 소중하게 다뤘어요. 축구화를 신고 학교에 다녀온 뒤에는 바닥에 묻은 흙먼지를 다 털어내고 걸레로 깨끗이 닦아서 머리맡에 두고 잤을 정도죠. 나중에는 어른들이 축구화에서 냄새 난다고, 바깥에 두라고 하셨지만요.(웃음) 축구부에서 처음 받았던 운동화는 서경 축구화였어요. 선수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인기 있었던 브랜드죠. 코가 닳아서 매직 같은 것으로 새까맣게 칠하기도 하고, 검정색 테이프로 붙였던 기억이 나네요. 선수 생활 중에 가장 애착이 갔던 축구화는 95년도에 신었던 나이키 축구화예요. K리그에서 8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던 당시에 신었던 축구화인데, 골 감각이 워낙 좋으니까 다른 축구화로 쉽게 갈아 신지 못했어요. 공격수들은 특히 그런 징크스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거든요. 그때만 해도 한두 경기 신었던 축구화는 늘어나서 금방 갈아주는 게 예사였는데,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축구화예요. 나중에는 앞쪽에 구멍이 날 정도였는데, 그래도 계속 골이 들어가니까 테이프를 붙여 신고 뛰기도 했어요. 수많은 축구화 중에 지금까지 갖고 있는 건 2002 월드컵 때 신었던 나이키 에어줌 토탈 90 축구화예요.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 신었던 축구화죠. 가볍고 편한 느낌의 축구화여서 좋아했는데,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던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그 당시 월드컵 대표팀 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유니폼과 함께 개인 소장하고 있는, 현역 시절의 거의 유일한 축구용품이랍니다.

06월25일

축구용품업계 최강자, (주)카포 곽중철 대표

곽중철 대표는 축구용품을 전국에 공급하며 연 매출 250억 원을 올리는 국내 축구용품업계의 선두주자다. 그러나 곽 대표의 성공신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과거 국내 신발산업이 호황일 때 축구화 제조의 장인(匠人)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일본 야스다스포츠의 축구용품을 OEM 방식으로 제작했었는데, 점차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로 마음 먹었다. 길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1980년대 말 유소년 축구팀 단장 자격으로 일본을 찾은 곽 대표는, 선수들과 함께 일본 축구용품 멀티샵을 찾았고 여기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국내 축구용품 시장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었기 때문에 국내 축구선수들이 국제경기를 위해 외국에 나가면 축구용품을 한 보따리씩 구입해 입국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당시 어린 선수들과 함께 일본 축구용품 멀티샵을 방문했죠. 그때만해도 국산 축구화는 KIKA 제품을 제외하고는 별로 내세울만한 축구화가 없었어요. 반면, 일본 축구화 시장은 아디다스, 푸마, 미즈노, 아식스 등 메이커 선택의 폭이 참 넓고 품질도 좋더라고요. 특히 많은 애들이 고민 끝에 국산 축구화의 몇 배가 넘는 선수용 축구화를 구입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이거다 싶었죠. 그래서 다양하고 질 좋은 축구용품에 목마른 국내 축구인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에 새로운 유형의 축구용품 멀티샵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1990년 동대문운동장에 한국 최초의 축구용품 전문샵을 오픈 했지만 출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일단 유명 메이커 상품을 취급하고 싶어도 응해주는 곳이 없었다. 곽 대표는 성공의 걸음마를 같이 할 파트너를 사방으로 찾기 시작했는데, 이때 1990년 중반부터 축구용품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나이키가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와 함께 쌓은 30여 년의 기술력과 수출 노하우를 바탕으로 축구용품 유통 사업에 강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축구 용품의 황무지인 우리나라에 새로운 낙원을 만들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특히 당시 국내 축구용품 시장은 몇몇 메이커의 직영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죠. 많은 고민 끝에 성공의 발판을 마련할 파트너로 당시 축구화 시장에서 막 기지개를 켜고 있던 나이키를 점 찍었고 오랜 권유 끝에 마침내 그들과 손을 잡게 됐죠. 나이키 역시 기존의 방식보다는 새로운 유형의 유통 방식으로 시장 개척에 나서려고 하는 마음이 컸어요. 결국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가파른 상승세를 타게 됐습니다.” 곽 대표의 전략이 주효하자 다른 유명 브랜드들도 자연스레 곽 대표의 명함을 찾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축구용품을 수주하여 소비자에게 신속하고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를 국내 최초로 선보인 곽 대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매장 일일 평균 방문객이 3,000여명에 달했을 정도로 축구 마니아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축구용품업체로서는 최초로 B2B 인터넷 주문 시스템 개설과 업계 최대의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EPR 시스템 구축을 통해 K-리그는 물론 세계 각국의 리그 정보와 각종 제품을 국내 시장에 선보이는 등 선진 축구문화 보급의 화수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축구 마니아의 지상천국인 일본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최근 우리나라도 점차 보는 축구에서 직접 즐기고 느끼는 축구로 탈바꿈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어요.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매력적인 축구시장으로 거듭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실제 전문화된 스포츠 카테고리를 만끽할 수 있는 멀티용품숍의 매력에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운 걸 보면서 국내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어요. 지난해 여름 축구화 프로모션을 위해 저희 카포스포츠 매장을 찾은 호나우지뉴마저 잠시 중력을 잃고 쇼핑의 매력에 빠졌을 정도니까요. (웃음)” 그러나 곽 대표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세계적 경제한파 속에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5년, 10년 후를 대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곽 대표는 현재 위치가 미래의 경쟁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친다. 현재 국내 축구유통업계 최초로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곽 대표는 앞으로 수익 창출 사업뿐만 아니라 선진 축구 문화의 정착과 유소년 축구 육성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자구적인 노력을 통해 카포스포츠를 한국 축구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그 동안 한국 축구는 아시아 최초로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등 많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선진화된 축구 인프라 구축에는 미흡한 점이 많고 자성의 목소리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저는 한국 축구의 발전이 없다면 카포스포츠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요구 속에 축구업계의 선두주자인 카포스포츠의 사회적인 역할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카포스포츠는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축구 협회와 프로구단 등과 연계해 유소년 축구 육성 프로그램, 용품 지원 등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향후 몇 년간 폭 넓은 투자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정말 믿어도 좋으실 겁니다. 제게 있어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며 그 기대와 믿음을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제 의무이자 책임이니까요.

06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