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 좋은 축구화는 골을 부른다

처음 축구를 시작했던 초등학생 시절에는 무조건 \'맨발\'로 뛰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길거리 축구화를 사다 주시면서 서서히 축구화의 귀중함을 깨닫게 됐죠. 제 축구화 첫 브랜드는 키카였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를게 없었죠. 당시에는 키카가 대세였으니까요. 중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아디다스와 나이키를 번갈아 가면서 신었습니다. 특별히 좋아서 신은 건 아니고 워낙 유명한 브랜드니까 믿고 신은 거죠. 그러나 어릴 때부터 축구화를 구하는 데 애를 먹곤 했어요. 워낙 발이 작아서 맞는 사이즈가 없기도 했거든요. 사이즈가 몇이냐고요? 250mm이요.(웃음) 프로에 입문하면서 처음으로 미즈노를 만났습니다. 가볍고 발에 딱 달라붙는 게 처음부터 저랑 잘 맞는 느낌이었어요. 데뷔 첫 시즌에는 나이키 토탈90과 함께 신었지만 2009 시즌이 개막하고서는 미즈노 모렐리아와 MR만 신고 있습니다. 다른 제품에 비해 가볍고 가죽도 좋고 처음 신었을 때부터 길들여져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 게 좋았어요. 주위에서 저랑 잘 어울린다는 말에도 귀가 솔깃했고요(웃음). 시즌 도중에 아디다스 베이퍼를 몇 번 신어봤는데 신을 때마다 발에 물집이 잡히더라고요. 전 한번 물집나면 다신 안신기 때문에 시도를 안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는 참고 오래 신어야 적응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워낙 좋다고들 하니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미즈노에 만족합니다. 저처럼 축구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선수라면 무엇보다 발이 편해야 하는데 미즈노는 그런 부분에서 저를 충족시키기 때문이죠. 이번 시즌 제가 많은 골을 넣을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도 좋은 축구화 덕분이겠죠.

11월13일

아디다스 프레데터 X 출시

3차원의 인체 공학적 발 모양으로 최상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옵티핏 테크놀로지는 모든 신발 소재가 가능한 한 발에 가장 잘 맞도록 해 볼 컨트롤과 움직임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캥거루 가죽보다 더욱 뛰어난 내구성과 터치감의 타우루스 송아지 가죽은 자연스러운 느낌과 가벼운 무게감으로 어떤 날씨 환경 속에서도 최상의 경기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해준다. 10번째 버전의 프레데터 익스는 생물학, 디자이너, 신발 개발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5년 이상의 연구, 개발을 통해 탄생되었으며, 이후 150명 이상의 프로 선수들과 아마추어 선수들의 다양한 테스트를 거쳐 경기력과 기능, 디자인에 있어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최고의 축구화 프레데터 익스는 이근호(쥬빌로 이와타)를 비롯해 발락(독일 – 첼시 FC), 데이비드 베컴(잉글랜드 – LA 캘럭시), 마르크 판 보멀 (네덜란드 – FC 바이에른 뮌헨), 스티브 제라드 (잉글랜드 – 리버풀 FC), 로빈 판 페르시 (네덜란드 – 아스널 FC), 라울 (스페인 – 레알 마드리드 CF), 파트리크 비에라 (프랑스 - FC 인터 밀란), 사비 (스페인 – FC 바르셀로나) 등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이 신게 될 예정이다. 새로운 프레데터 익스는 11월 5일부터 전국 아디다스 매장에서 판매되며, 2010년 월드컵 공인구 컬러의 프레데터 익스는 2009년 12월 5일 부터 판매된다. 가격은255,000원

11월09일

브라질 축구화를 아시나요?

* 페널티(PENALTY) 페널티는 1970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탄생했다. 사실 페널티는 톱퍼 보다 5년 먼저 창립된 브랜드다. 페널티가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건 1990년대 초다. 브라질의 명문 클럽인 상파울루FC가 1992년과 1993년에 연속으로 토요타컵 우승을 차지했는데 당시 상파울루FC 스폰서가 페널티였다. (당시 상파울루FC 선수들의 흰색 유니폼 상의 오른쪽 가슴 부위에 \'PENALTY\'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1992년 토요타컵 때 상파울루FC는 스페인의 FC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대1로 승리했고, 1993년 대회에서는 호화 멤버의 AC밀란을 난타전 끝에 3대2로 꺾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토요타컵은 전세계 90개국이 넘는 나라에 생중계 됐기 때문에 페널티로서는 홍보 차원에서 더할 나위 없이좋은 기회였다. 국내에는 페널티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 J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 특히 브라질 선수들 몇몇은 페널티 축구화를 착용한다. 톱퍼와 페널티는 아디다스, 푸마, 디아도라, 아식스, 미즈노 등의 유명 브랜드에 비해서 역사도 짧고, 인지도도 낮지만 제품의 질이 좋기 때문에 브라질 국내에서의 반응은 매우 좋다.톱퍼-페널티 외에 데스포르티(Desporte)라는 브랜드도 있는데 데스포르티는 축구화 보다는 풋살 슈즈로 명성을 얻고 있다.

11월09일

크로노스(Kronos), 월드컵 득점왕의 무기

크로노스가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4년 후인 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 이 대회에서 불가리아의 슈퍼스타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크로노스 축구화를 신고 맹활약하면서 득점왕을 차지한 것이다. 8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등장한 불가리아는 세계적 공격수 스토이치코프를 중심으로 매 경기 화끈한 공격력을 펼치며 4강까지 진출했다. 스토이치코프는 독일과의 8강전에서 환상의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는 등 발군의 기량을 선보이며 총 6골로 러시아의 올레그 살렌코와 함께 득점왕에 올랐다. 당시 스토이치코프가 신었던 축구화는 소가죽(Calf) 제품이었고, 모델명은 Stoitchkov Top이었는데 혀 부분에 \'Stoitchkov Top\'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크로노스 축구화를 신은 선수들이 2회 연속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했다는 것은 크로노스사로서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다. 크로노스 축구화는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가죽이 매우 부드럽게 착용감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크로노스는 스토이치코프를 비롯한 세계적 선수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그들의 조언을 반영해 질 좋은 축구화를 생산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90년대 SERIE-A 우디네세, AS로마 등에서 명성을 날린 아르헨티나 스트라이커 아벨 발보도 크로노스 애용자 가운데 한 명이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10월26일

아련한 한국 축구화의 추억 그리고 역사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에는 시장표 축구화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제품은 ‘월드컵’과 ‘재규어’였다. ‘월드컵’은 검정색 인조 가죽에 흰색 마크, 흰색 줄, 검정색 고무 창으로 된 제품이었는데 당시 월드컵 축구화를 신으면 학교에서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였다.(그 때 나온 월드컵 축구화는 W마크가 아니었다.) ‘월드컵’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축구화가 ‘재규어(Jaguar)’다. 배진경 기자의 기사(\'어린 황선홍의 소중한 축구화\')를 보면 황선홍 감독이 \"축구화를 처음 신었을 때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해요. 아버지가 사주신 첫 축구화는 \'자가\'라는 시장표 축구화였어요.\"라고 말을 했는데 황선홍 감독이 말한 \'자가\'가 바로 재규어다. 재규어는 월드컵 축구화 보다 무광택의 검정색 인조 가죽에 흰색 줄이었고, 마치 재규어가 뛰는 모습의 흰색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현재 미즈노 디자인과 비슷하다.) 월드컵-재규어의 반응이 좋자 박스컵, 킹스컵 등의 시장표 축구화가 연이어 등장했으나 월드컵-재규어를 능가하지 못했고 이후에 생산된 우남 축구화가월드컵-재규어 보다 질이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우남은 검정색 가죽에 흰색 마크, 흰색 줄로 된 축구화였는데 프로스팩스와 비슷한 마크였다.(참고: 박스컵(Parks Cup)은 당시 국내에서 매년 개최된 박정희 대통령배 국제축구 대회를 의미하는 것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필자는 틈만 나면 효창구장에 담을 넘어 들어가 경기를 관전했는데 선수들이 신고 있는 축구화를 보니 대부분 검정색 줄이었다. 그걸 알게 된 필자는 축구화 줄을 검정색으로 교환해서 신었다. 박항서 감독을 비롯한 여러 축구인들이 언급한 서경(西京)-정신(正信) 축구화는 정확히 말하면 ‘선수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식 축구부 학생들과 성인들(조기 축구 아저씨들)이 주로 신었다. 월드컵과 재규어 축구화는 시장 신발 가게에서 팔았고, 정신과 서경 축구화는 체육사에서 팔았는데 서경과 정신은 초등학생들 발에 맞는 작은 사이즈를 많이 생산하지 않았던 터라 동네에 있는 체육사에서는 구입이 어려웠고 동대문 운동장 근처 대형 체육사에 가야 구입할 수 있었다. 값은 당연히 서경-정신 축구화가 월드컵-재규어 축구화 보다 비쌌다. 그 무렵 서경 축구화의 인지도는 독보적이었다. 조기 축구 아저씨들 80% 이상이 서경 축구화를 신었을 정도니까. 당시 서경 축구화는 가죽 제품 보다 쎄무로 된 제품을 많이 생산했는데 그 중에서 검정색 쎄무에 초록색 라인이 새겨진 디자인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서경 축구화의 특색 중 하나가 혀 부분이 ‘진짜’ 선수들이 신는 독일제 아디다스와 일제 아식스 축구화처럼 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정색 뿐 아니라 파란색 세무로 된 축구화도 생산이 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서경 축구화가 시대를 앞서간 듯하다. 정신 축구화도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서경 축구화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신의 경우엔 축구화 뿐 아니라 복싱화도 생산을 했다. 한국 프로 복싱사에 한 획을 그은 前WBA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작은 거인\' 김태식이 현역 시절 빨간색 슈즈를 신었는데 그 슈즈가 정신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덧글: 80년대 중반까지, 국내 축구팬들은 물론 축구인들 조차도 축구화 밑(바닥) 부분을 ‘스터드(Stud)’라고 하지 않고 \'뽕\' 혹은 \'찡\'이라고 표현했다. 필자의 기억에 \'스터드\'란 단어를 팬들에게 각인시킨 축구인이 이우현 선생이다.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을 지낸 이우현 선생은 80년대 중반 MBC 축구 해설위원을 역임했는데 그 무렵 중계 때 “오늘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잔디가 미끄럽다. 이럴 때는 선수들이 고무 스터드가 아닌 알루미늄 스터드 축구화를 신는 게 훨씬 낫다“는 등의 해설을 해준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우현 선생은 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도 MBC 해설위원을 담당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10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