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라이징의 파도가 밀려 온다

직원은 이 작업장은 약 1년 전에 만들어졌고 하루에 총 8명의 고객을 상담할 수 있는데, 예상보다 훨씬 고객들의 반응이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나만의 축구화를 만드는 총 가격이 200파운드(약 40만 원)이라는 고가인 것을 고려해볼 때 얼마나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이런 조류가 인기를 끌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비단 이러한 인기는 나이키만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국내에도 들어와 있는 아디다스의 Mi Adidas도 유럽에서 많은 동호인의 주머니를 축내고 있다. 비단 나이키 타운뿐만 아니라 경기장과 함께 있는 구단 공식 기념품 판매장에서도 퍼스널라이징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토트넘, 볼튼, 아스널 그리고 파리 생제르맹 경기장과 공식 기념품 판매장을 방문했는데, 모든 곳에서 바로 유니폼에 이름을 새길 수 있는 장비가 마련돼 있었다. 원하는 선수 이름은 물론이고 어떤 이름이라도 새길 수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일견 똑같아 보이는 축구화나 유니폼이지만 이름이나 문구 그리고 엠블럼이 들어가면 금세 ‘나만의 물건’으로 바꾸는 것이 퍼스널라이징의 위력이다. 그리고 유럽 사람들은 퍼스널라이징을 통해 기성품에도 자신의 개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는 한국에서는 미력하게 느꼈던 그 바람을 유럽 현지에서 확실하게 맛봤다.

12월14일

축구화는 대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나절 동안을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 고생하면서 영국에 도착했지만, 는 사실 피곤함보다 즐거움이 앞섰다. 나름대로 축구화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축구화 선진국인 유럽의 경향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게다가 영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축구화 쇼핑의 메카가 아닌가! 결론적으로 신대륙으로 신문물을 찾아 떠나는 선구자의 기분이랄까. 물론 독자들에게 미리 이야기했던, ‘축구화는 곧 축구 문화’라는 말을 증명하겠다는 사명을 길 앞에 세웠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지금부터 가 축구화와 6박 7일 동안 동고동락하며 듣게 된 이야기를 여러분께 소개한다. 런던 시내의 크고 작은 용품샵과 각 브랜드 매장을 둘러보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한국과 너무나도 다른 축구화의 종류였다. 한국 매장에는 FG(Firm Ground)스터드와 HG(Hard Ground)스터드를 장착한 모델들이 대부분인데 비해서 영국, 프랑스 매장에는 거의 SG(Soft Ground)스터드 축구화만이 전시돼 있었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중급과 하급 모델에도 SG스터드를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SG스터드 축구화는 고급 축구화의 전유물 또는 선수용 축구화로 알려졌다. 그만큼 매장에서 보기 어렵고, 구매하는 이들도 매우 적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이런 축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SG스터드 축구화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계산대로 가지고 가는 소비자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얼핏 복잡한 설명을 요하는 이 질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 바로 땅, 운동장의 차이다. 한국에는 소위 흙 바닥 운동장이 보편적인 데 비해서 잔디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유럽에서는 잔디 운동장이 수두룩하다. 이러한 운동장에는 당연히 SG스터드와 FG스터드가 필요하다. 그런데 유럽 잔디는 잘 알려진 대로 푹신푹신하다 못해서 거의 진흙과 같이 무르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는 더 지지력이 좋은 SG스터드 축구화가 사랑을 받는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유럽에서 치러지는 EPL이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는 SG스터드를, 국내에서 치러지는 국가대표팀 경기에서는 FG를 선호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에서는 화려한 색상 축구화가 별로 팔리지 않는다. 이것은 영국인들의 우울한 기질과 관계가 있다. 영국에서 학창 시절을 모두 보낸 어떤 유학생은 “화려한 축구화를 신으면 악의적인 태클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위건 애슬래틱의 조원희도 “영국에서는 날렵한 축구화보다 투박하고 믿음직스러운 것들이 선수들에게 사랑받는다”고 증언했다. 화려한 축구화를 선호하는 독자 중에서 영국 어학연수나 유학을 생각하고 계신 분은 꼭 유념하시길 바란다!

12월01일

못 다 피운 꽃, FILA 축구화

21세기 축구화 시장은 나이키, 아디다스, 푸마 그리고 미즈노 등 몇몇 브랜드가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밝혔던 것처럼 20세기에는 축구화 시장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였다. 많은 브랜드들이 도전장을 내밀었고, 혹은 성공하고 더러는 실패를 맛봤다. FILA도 마찬가지였다. FILA는 1911년 이탈리아의 FILA 형제가 창업한 회사로서 초창기에는 알프스 지역 사람들에게 적합한 의류를 주로 생산했다. 이후 1970년대 초에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에 인수된 FILA는 모터 스포츠 유니폼 및 테니스 종목으로 진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급기야 1990년대 중반 축구 종목에도 손을 뻗쳤다. 그러나 FILA는 ‘스포츠 브랜드’로서의 인지도는 높았지만 축구 쪽에서는 매우 낯선 브랜드였다.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선 세계적 스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야 했고, 확실한 전략이 필요했다. 즉, 세계적 선수들에게 FILA 축구화를 착용케 해야 했다. 그 무렵 FILA 축구화를 신은 유명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시니사 미하일로비치(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세바스티안 베론(아르헨티나), 나카타 히데토시(일본), 클라우디오 레이나(미국). 하나 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들이다. 잘 알려진대로 미하일로비치는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겸하는 선수로서 1990년대 세계 최고의 프리킥커 중 한 명이었다. 레오스타 베오그라드에서 1992년 이탈리아 SERIE-A AS로마로 이적한 미하일로비치는 이후 삼프도리아-라치오-인터 밀란 등을 거치며 좋은 플레이를 펼쳤다. 그는 98년 프랑스 월드컵에 FILA 축구화를 신고 출전해 조별 예선 이란과의 경기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 시켰다. 탁월한 패스 센스를 자랑하는 베론 역시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FILA 축구화를 신고 출전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아르헨티나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없어서는 안될 핵심적인 선수였던 베론은 특히 롱패스 정확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미드필더 나카다는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나이키를 애용하다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전,후로 FIlA 축구화를 신었다. 그러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FILA 축구화를 착용하는 선수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기능성은 알 길이 없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최고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FILA 축구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로고였는데 대부분의 축구화 로고는 라인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서 FILA는 축구화 양 측면에 ‘F’자를 크게 새겨 넣었다. 타브랜드에 비해서 독특한 디자인이었지만 투박하다는 평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최근까지 FILA축구화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성인용이 아니라 FILA의 이름만 쓰고 있는 형식으로 아동용 축구화가 나오고 있다. 필자인 김유석은 어린 시절 수없이 효창 운동장 담벼락을 넘었던 진정한 사커 키드다. 모두 대통령을 꿈꾸던 시절 홀로 차범근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바로 그다. 축구를 풍성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11월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