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만든 축구화, 미즈노
2009.05.04 18:19:33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고, 불만은 발명의 씨앗이다. 이러한 속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이번에 소개할 미즈노(MIZUNO)의 이야기다.

불만에서 태어난 첨단 기술

미즈노 축구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렐리아(Morelia)’를 빼놓고는 미즈노의 역사를 논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개발자인 야스이 토시야스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모렐리아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만큼 야스이와 그가 만들어낸 모렐리아 라인이 미즈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미즈노 축구화의 역사는 야스이와 모렐리아의 역사’라고 이야기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1906년 설립된 미즈노의 역사는 백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미즈노 축구화의 역사는 이제 겨우 24년에 불과하다. 야스이가 1985년 모렐리아를 개발한 것이 ‘진정한’ 미즈노 축구화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축구화가 출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미즈노의 국내 대행사인 덕화스포츠의 이상일 대리는 “그 전에는 솔직히 축구화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울 정도의 제품이었다. ‘세계에서 통용되는 축구화’를 지향하던 모렐리아의 탄생이 미즈노 축구화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야스이는 이미 고등학교 졸업 레포트로 당시 잘 팔리던 축구화를 철저하게 비교했고, 미즈노에 혹평을 가했다. 하지만, 그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본 선배가 입사를 권유했고, 야스이는 1980년에 미즈노에 입사해 신발 기획부에 들어갔다. 사실 실무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던 야스이는 2년 동안 지식을 습득하고 기술을 연마했고, 일본인 출신으로 최초로 브라질 리그(상파울루FC)에 진출한 미즈시마 무사시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참고해 1985년 모렐리아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미즈시마는 1983년 야스이에게 “브라질 선수들은 축구화를 수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부드러운 것을 원한다”고 이야기했고, 이것은 모렐리아의 모토가 됐다. (첫 모렐리아는 245g(260mm)이었는데 당시 축구화의 평균 무게는 300g이 넘었다.)


“이것은 신이 만든 신발이다”

모렐레아는 뛰어난 품질로 브라질에서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야스이는 1985년 브라질을 직접 방문했을 때 상파울루의 다른 선수들도 모렐리아를 신고 있었다. 미즈시마가 계속해서 모렐리아를 신자 이를 눈여겨본 다른 선수들이 몇 번 빌려서 신다가 구매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는 브라질의 유명한 스트라이커 카레카도 있었다. 당시 카레카는 심각한 부상을 당한 후 재활을 하고 있었는데 모렐리아를 신고 한 경기에서 두 골을 넣으며 부활의 찬가를 불렀다. 모렐리아의 품질에 감동한 카레카는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신이 만든 신발이다. 이것은 제작자의 마음이 들어간 신발이다”라고 극찬을 마지 않았다. 이후 카레카는 나폴리로 이적했고 미즈노는 유럽 시장도 잠식해 들어갔다.

미즈노의 고집과 명성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도 건재하다. ‘경량성, 유연성, 맨발감각’을 내세우는 미즈노는 최상급 모델의 경우 일본 제작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루마니아 리그에서 뛰었던 김길식(현재 대전)은 본의 아니게 휴식기마다 ‘보따리 장사’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는 2008년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루마니아 리그에서 뛰던 동료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미즈노를 구해달라’며 돈을 내미는 바람에 축구화를 ‘구매대행’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만큼 미즈노의 품질은 뛰어났던 것이다. 직접 체험한 이야기도 있다. 지방 모 구단을 취재하던 동료 기자는 “미즈노를 신으니 다른 신발을 못 신겠다”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도 했다.


마케팅도 축구화 제작과 같다

“돈은 나중에 따라오는 것이고 다액의 계약을 할 계획은 없다. 그렇지만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이 이 신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모렐리아의 아버지 야스이의 말이다. 그리고 미즈노 마케팅의 금과옥조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즈노는 국내에서 최근까지도 다른 브랜드에서는 보편적인 ‘현금지원’을 하지 않았다. 축구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인 축구화를 최고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돈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라는 조금은 우직한 믿음에서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즈노를 신은 선수들이 활약을 펼치고 있는 것은 이 믿음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일 대리도 품질과 전통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축구화는 선수들이 그라운드 위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제품이다. 축구화가 그 선수 고유의 능력을 발휘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즈노는 제품이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은 분명히 따라온다고 선수들에게 설명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미즈노의 경우에는 선수들을 마케팅과 홍보용으로 이용하기 보다는 선수들이 원하는 축구화를 공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 대리는 “선수들이 다양한 만큼 축구화도 다양해야 한다. 그 부분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우리 제품이다. 제품 자체로 보면 어떤 브랜드에게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대리는 인터뷰 말미에 미즈노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이야기를 내놓았다. 그는 “시장성이 없더라도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미즈노를 선택하는 선수들에게 ‘미즈노에는 내 발에 맞는 축구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많은 종류의 축구화가 많아지기는 했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품질에 대한 고집과 확신. 미즈노를 현재의 자리에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사족 1
1985년 당시 모렐리아에는 지금처럼 ‘미즈노’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다. 모렐리아는 ‘런버드(Run Bird)’라는 이름으로 팔렸다. 도요타가 ‘렉서스’라는 이름으로 고급차 시장을 공략했듯이 미즈노도 모렐리아로 완전히 새롭게 탄생했던 것이다.

사족 2
미즈노 축구화의 가장 기본 배색은 검은색 마탕에 흰색 로고 그리고 빨간색의 조화다. 이것은 미즈노의 자문이자 최초 착용 선수였던 미즈시마 무사시의 소속팀인 상파울루fc의 유니폼 색상과 일치한다. 미즈노의 미련스런 고집이다.

사족 3
브라질 선수들의 미즈노 사랑은 대단하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한 22명의 브라질 대표선수 중에서 15명의 선수가 미즈노를 신고 있었다. 후에 '왼발의 달인' 히바우두는 '웨이브컵 히바우두'라는 제품 라인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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